이 글은 제가 뉴욕 유학 시절의 연애 경험을 바탕으로 창작한 감성 소설입니다. 현실과 허구의 경계에서 기억과 감정을 재구성해 써 내려간 이야기입니다.
그날 밤,
혼자 와인 한 잔을 따르며 그를 생각하던 서연은
문득, 오래전의 자신에게로 돌아갔다.
그 첫 여정의 무게와,
그 무력한 청춘의 공기를 떠올리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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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먼 곳에서 시작된 외로움, 뉴욕이라는 낯선 꿈 -
긴 비행이었다.
푸른 바다가 아래로 끝없이 펼쳐지고,
순간, 뛰어들어 맨몸으로 헤엄치고 싶은 충동이 스쳤다.
가족과의 이별로 허전해진 마음 때문이었을까.
좁은 좌석에 깊숙이 파묻힌 채
서연은 간간이 눈물을 훔치며,
점점 하나의 질문으로 머릿속이 가득 채워졌다.
이 넓은 시간과 공간 속에서, 나는 어떤 존재일까.
창밖으로는 뭉게뭉게 구름이 떠다녔다.
그 위를 사뿐사뿐 건너갈 수 있다면,
다시 돌아갈 수 있을까.
그저 어디로든 사라져도 좋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이코노미 클래스.
몸 하나 제대로 펼 수 없는 좌석에
온갖 유색인종들이 가득했다.
누구도 환영받지 못한 채,
거대한 하늘을 지나는 불청객처럼.
그녀 옆에 앉은 백인 남자는 계절에 맞지 않는 낡은 양복을 입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당당했다.
피부색 하나로 나뉘는 위계.
흑인 스튜어디스는 동양인을 지나치듯 대했고,
승무원들의 시선은 짐짝을 다루듯 무심했다.
그래도 일본인 승무원은 친절했다.
그 미묘한 차이조차 낯설게 느껴졌다.
그녀의 대학 노트를 힐끔거리던 중년 미국인이 이내 말을 걸었다.
노트를 보는 눈빛이 바뀌자, 태도도 달라졌다.
"Enjoy New York,"
비행기에서 내릴 때, 그가 건넨 마지막 말.
그 말이 어딘지 모르게 허공에 맴돌았다.
공항에서 마중 나온 사람을 찾지 못해 서연은 30분 넘게 이리저리 헤맸고,
결국 택시를 타고 낯선 도시를 가로질렀다.
안개 속에서 빌딩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거대한 마천루였지만, 그날의 서연에겐 왠지 작고 아담하게 보였다.
무슨 징조였을까. 그곳이 바로, 수많은 이들이 꿈꾸는 맨해튼이었다.
숙소는 현실이었다.
어둡고 낡은 바닥, 먼지 낀 창틀,
가구 하나 없이 텅 빈 방.
뻑뻑한 벽장 문은 잘 열리지 않았고,
싱크대는 물이 빠지지 않았다.
그 순간, 서연은 진심으로
비행기를 돌려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필요한 생필품을 사서 방에 들였고, 근처 한인 식당에서 육개장을 먹었다.
달착지근한 국물 맛도, 가격도 모두 낯설었다.
무표정한 채, 그녀는 생각했다.
나는 지금, 어디쯤 와 있는 걸까.

서연은 늦잠을 잤다.
워싱턴 스퀘어 파크 앞 벤치에서 랩의 보스와 마주했다.
핫도그와 샐러드로 나눈 첫 식사. 맨해튼의 공기는 아직 낯설지만,
이제야 조금 세상이 보이기 시작했다.
이 도시의 중심은 마치 서울의 강남과 명동, 대학로를 섞어놓은 듯했다.
상점과 학교, 사람들의 속도는 빠르지만 익숙했다.
서연은 동네를 익히기 위해 몇 블록을 걷고 또 걸었다.
조그마한 수첩엔 낯선 거리의 이름이 빼곡하게 메모되어 갔다.
뉴욕은 길치에겐 덫 같은 도시.
방향감각 없이 걷다 보면 맨해튼의 그물망 속에서 순식간에 길을 잃게 된다.
어두워지면 강도가 출몰한다는 말에, 그녀의 걸음은 자연스레 빨라졌다.
쌀알 하나 없는 끼니, 시차에 흐트러진 리듬, 그리고 걷기.
허기라는 감각이 빠르게 되살아났다.

랩에 도착해 한국인 선배의 소개로 사람들과 인사를 나눴다.
선배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여긴 돈이 다야. 깔끔하게 입고 다니고, 당당해 보여야 해. 안 그러면 무시당해."
서연은 미소를 지었다.
Nice 하게. 그러니까, 서울에서 살아온 방식 그대로.
자신 있는 척, 밝은 얼굴, 계산된 친절.
이곳도 결국은 얌체들이 먼저 손을 뻗는 세계일까?

아직도 사람들이 그토록 부러워하는 미국의 장점은 잘 보이지 않았다.
맨해튼의 빌딩들을 올려다보며 그녀는 문득 생각했다.
이 도시를 지탱하는 건 개인이 아니라 '조직'이다.
거대한 시스템 속에서 사람들은 자유를 얻는 대신, 철저히 자신의 역할에 갇혀 산다.
세금은 비싸다. 하지만 아마도 그 돈으로 이 철벽같은 조직이 유지되겠지.
실제로 맨해튼 군데군데 있는 학교 건물은 건물마다 조금씩 다른 특징이 있지만,
서연이 있는 곳은 두꺼운 철문으로 각방의 문이 만들어져 있다. 거대하다.
각 사무실은 업무별로 명확히 나뉘고,
사람들은 그 안에서 자신만의 칸막이에 갇힌 채 하루를 보낸다.
모든 것이 효율적이지만, 그녀에겐 이 모든 것이… 참 낯설었다.
암실은 오늘도 고요했다.
서연은 형광 염색된 조직 슬라이드를 현미경 아래에 올려놓고, 천천히 초점을 맞췄다.
하루 종일 현미경 속 다른 세계와 현실의 세계를 오가며 셔터를 눌러댔다.
때로는 암실의 적막 속에서 종이 위에 형광빛을 인화하며,
그녀는 자신이 연구자가 아니라 어딘가 미완의 예술가인 듯 느껴지기도 했다.
형광빛은 세포의 생명을 보여주었지만, 그녀에겐 그것이 일종의 고백처럼 다가왔다.
고요하지만 강렬하게, 침묵 속에서 자신을 드러내는 감정의 언어.

비행기를 타고 이곳에 도착한 첫날,
좁고 어두운 숙소와 무표정한 거리,
그리고 어색한 영어 속에서 스스로가 너무나도 작고 낯설게 느껴졌었다.
그러나 지금— 뉴욕 한복판의 작은 실험실에서,
서연은 자신이 조금씩 ‘살아 있다’라는 감각을 되찾아 가고 있었다.
학교에서 마주친 사람들, 날카로운 경쟁, 계산적인 웃음들 속에서도
그녀는 꺾이지 않았다.
오히려 점점 단단해졌다.
형광빛 세포들처럼.
어둠 속에서도 자신의 빛을 찾아내는 법을 배워가는 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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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어쩐지,
그 모든 시간들이 지금의 그 사람,
정현우와의 감정과도 어딘가 닿아 있었다.
빛은 어둠 속에서 더 선명하듯,
그의 눈빛도, 그의 말들도
그녀에겐 그렇게 선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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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성 연애소설 ◁ 사랑의 끝을 말하다 ▷ 연재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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