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제가 뉴욕 유학 시절의 연애 경험을 바탕으로 창작한 감성 소설입니다. 현실과 허구의 경계에서 기억과 감정을 재구성해 써 내려간 이야기입니다.
- 이름 모를 그림자들 -
정현우는 말수가 적었다.
그렇다고 차가운 사람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의 침묵은 따뜻했고, 묘하게 감미로웠다.
말보다는 눈빛으로, 눈빛보다는 손끝으로 감정을 전하는 사람.
그의 사랑은 항상 그렇게 시작되었다.
서연은 어느새 그에게 익숙해져 있었다.
그의 방식에,
그의 속도에,
그의 뜨거운 무심함에.
하루의 끝.
기나긴 강의를 마친 서연은 정현우의 작업실로 향했다.
그날 저녁, 유난히 바람이 매서웠고
현우는 오래된 레드 와인 한 병을 꺼냈다.
잔에 와인이 따를 때,
프랑스 남부에서 온, 시간이 머금은 과실 향.
서연의 기억 한쪽에서
맨해튼 8번가, 바람 불던 늦가을 거리 플리마켓이 불쑥 떠올랐다.
그곳에서 우연히 마주친, 바랜 고흐의 그림집.
책장에 스며든 먼지 냄새, 종이의 질감, 손끝에 닿았던 낡은 표지.
그 순간의 고요한 설렘이 지금의 감각과 겹쳤다.
그날도 서늘한 바람이 불었고,
서연은 혼자였다.
하지만 그림 속 고흐의 선들과 색채가
무언가를 이해받는 듯한 위로가 되었었다.
지금, 와인 잔을 든 이 고요한 순간.
현우의 옆에서 느끼는 따뜻한 침묵은
그때의 위로와 닮아 있었다.
설명할 수 없는 안도감.
삶이 잠시 멈추어도 괜찮다고 말해주는 감각.


서연은 잔을 들고 조용히 웃었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말없이 현우를 바라보았다.
사랑은, 어쩌면 이런 순간에서 다시 시작되는 것인지도 몰랐다.
병 입구에서부터 이미 달콤한 과실 향이 서연의 감각을 물들였다.
“좋아해요?”
그가 물었다.
“응. 오늘은 좀 마시고 싶었어.”
서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소파 위에 나란히 앉아 음악을 들었다.
바흐의 마태수난곡 2악장이 흐르고 있었다.
와인잔을 기울이는 그의 손동작은 늘 정제되어 있었고,
서연은 그런 모습에 또 한 번 빠져들고 있었다.
그러다 무심코,
거실 한쪽 작은 책장 아래에서 바스락거리는 종이 소리를 들었다.
서연은 앉은 채로 몸을 숙여 먼지 낀 상자를 꺼냈다.
“이건 뭐예요?”
현우가 돌아보기도 전에 서연은 상자 안의 사진 몇 장을 꺼내 들고 있었다.
사진은 오래된 흑백이었다.
젊은 정현우가,
누군가의 어깨에 기대어 웃고 있었다.
그 옆의 여자, 긴 생머리에 다정한 눈웃음.
“누구예요?”
그의 과거는 서연에게 늘 베일 같았다.
그러면서도 너무 궁금했다.
어떻게 이런 사람이 되었는지, 어떤 사랑을 했는지.
현우는 사진을 조용히 받아서 들었다.
눈길이 사진 위를 잠시 흘렀고 그의 시선은 그 어느 때보다 길었다.
“…같이 유럽에 있었던 시절의 친구예요. 동료였고… 좀 더 가까웠던 사람.”
그 말은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지금은…?”
“지금은 각자의 자리에서 각자의 삶을 살고 있죠.”
그의 대답은 아주 평온했지만,
그 말에 서연의 마음은 묘하게 일렁였다.
며칠 후,
정현우가 서연에게 전시회 티켓을 건넸다.
“클림트 드로잉 전이에요.
완성된 그림 말고, 그가 남긴 선들… 그중엔 미완성도 있죠.
그게 더 클림트다워요. 거칠고 날 것 같고.”
전시가 열린 미술관은 도심 깊은 골목에 숨겨진 작은 장소였다.
벽에 걸린 스케치들은 숨소리까지 들릴 듯 정적이었다.
남자의 손을 잡은 채 그림 앞에 서 있는 서연은
순간, 무언가에 휩싸이는 느낌을 받았다.
정현우가 말했다.
“완성된 사랑보다, 그리다 만 선 하나가 더 절박하잖아요.
끝내지 못해서, 잊히지 않는 거.”
서연은 그의 옆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생각했다.
‘그의 과거도, 누군가 그 절박한 선 하나였을까.’
그의 말은 그림을 두고 한 이야기였지만,
그 안에 너무 많은 것들이 담겨 있었다.
그 순간부터 서연은 이상하게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그의 손을 잡고 있으면서도,
마치 그의 그림자만을 붙들고 있는 것 같았다.
전시를 마치고 나왔을 때,
밖엔 비가 내리고 있었다.
조용하고 부드럽게,
마치 모든 흔적을 덮어주려는 것처럼.
정현우는 우산을 들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오늘 어땠어요?”
“좋았어요.”
서연은 거짓 없이 대답했다.
그리고 그가 말했다.
“당신은 내게 지금, 이 순간의 모든 것이에요.”
그 말은 달콤했고, 그래서 더 잔인했다.
‘지금, 이 순간’만 존재하는 사랑.
내일은, 없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그녀는 느끼고 있었다.
돌아오는 차 안,
서연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정현우는 클래식을 틀었고,
차창 넘어 회색빛 도시가 빗물에 번지고 있었다.
그 순간 그녀는 떠올렸다.
미켈란젤로의 피에타를 처음 마주했던 날을.
슬픔과 아름다움이 공존하는 그 조각 앞에서
서연은 막연히 생각했었다.
‘가장 아름다운 사랑은,
가장 깊은 슬픔을 남긴다.’
지금, 그녀는 그 장면 속에 있었다.
그의 옆에서,
이 사랑의 비극을 느끼기 시작하는 바로 그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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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성 로맨스 ◁ 사랑의 끝을 말하다 ▷ 연재 중입니다.
잠시 일상을 멈추고 이별의 논리에 젖어든 한 장면 속으로 함께 걸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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