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제가 뉴욕 유학 시절의 연애 경험을 바탕으로 창작한 감성 소설입니다. 현실과 허구의 경계에서 기억과 감정을 재구성해 써 내려간 이야기입니다.
나의 사랑, 나의 불안
서연은 늘 조용한 사람이었다.
말보다 눈빛이, 눈빛보다 손끝이 더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었고,
그래서였는지 정현우는 그녀와 함께 있을 때면 묘하게 침묵이 익숙해졌다.
그 침묵 속에서 피어나는 감정들이 있었다.
귓가에 맴도는 베토벤의 피아노 협주곡,
이른 아침 창가에서 마시는 커피 향,
그리고 새벽녘, 서로의 온기에 기대 잠들던 순간들.
정현우는 서연이 가져다준 고요 속에서
처음으로 자신이 ‘누군가에게 속해도 괜찮다’라는 느낌을 받았다.
그건 그에게 낯선 일이었다.


사랑이라는 이름 아래 누군가에게 기대는 일이,
그리도 조심스럽고 두려운 것이라는 걸, 그는 처음 알게 되었다.
하지만 그건 착각이었다.
불안은 생각보다 가까이에 있었다.
그는 종종, 자신도 모르게 뒤를 돌아보았다.
항상 무언가를 잃을 것 같은 예감,
아니, 언젠가는 잃을 것이라는 확신이 그를 조급하게 만들었다.
그날도 그랬다.
서울 외곽의 작은 갤러리.
서연이 즐겨 찾던 그 전시관에서 <사랑과 상실의 회화展>이 열렸다.
초대장을 내민 건 서연이었다.
“같이 가요. 그림 좋아하잖아요.”
그녀는 그렇게 말했고, 정현우는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약속 당일 아침,
그에게서 도착한 메시지는 너무도 짧고 담담했다.
“오늘 논문 때문에, 도서관에 좀 더 있어야 할 것 같아요. 미안.”
서연은 한참 동안 핸드폰을 내려다보다가,
조용히 화면을 꺼두고 코트를 걸쳤다.
그날 전시관엔 비가 내렸다.
모네의 흐릿한 풍경화 앞에서 그녀는 혼자 서 있었다.
물빛처럼 번져가던 그 감정들은,
어쩌면 오래전부터 이미 시작된 이별의 조각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녀는 문득, 예전의 자신을 떠올렸다.
기차역에서 홀로 정현우를 기다리던 그날.
길게 늘어선 그림자 속에서,
그가 오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스스로를 다독이던 순간.
“변한 건 없네.”
그녀는 작게 웃었다.
하지만 그 웃음은 오히려 무언가를 포기한 사람의 그것처럼 보였다.
밤이 되자 정현우는 서연의 집으로 찾아왔다.
젖은 코트에서 떨어지는 빗방울,
두 손으로 어색하게 접은 꽃다발 하나,
그리고 말끝이 맺히지 않는 사과의 눈빛.
“미안해요. 끝내고 바로 오긴 했는데… 늦었죠.”
서연은 고개를 저었다.
그 눈동자에는 분노도 실망도 없었다.
대신, 익숙함이 있었다.
“아니요. 항상 늦는 거죠. 당신은.”
정현우는 순간 말을 잃었다.
그녀가 그런 말을 할 줄은 몰랐다는 듯.
“…그게 무슨 뜻이야?”
그의 목소리는 불안하게 떨렸다.
“당신 마음속에 늘 누군가 늦게 도착하잖아요.
나도 그중 하나일 뿐이겠죠.”
그 말은 마치 칼날처럼,
조용히, 하지만 정확하게 그의 심장에 박혔다.
정현우는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다가 다가가 그녀의 뺨을 감쌌다.
그 손길은 따뜻했다.
하지만 서연의 눈은 차가웠다.
마치 그 온기를 오래전부터 믿지 않았다는 듯.
“당신은 아름다워요, 서연.
그런데… 난 가끔, 그 아름다움이 내 삶에 어울리지 않는 옷처럼 느껴져요.
내가 입기엔 너무 정직하고 단정해서.”
그 말은 어쩌면 처음이자 마지막 고백이었다.
사랑한다는 말이 없었지만,
그 모든 말은 결국 ‘사랑하지만 불안하다’라는 고백이었다.
서연은 그 말을 듣고도 아무 말 없이 그를 안았다.
그 품은 따뜻했지만, 어딘가 낯설었다.
마치 겨울 햇살 같았다.
빛나지만 오래 머물지 못하는.
그날 밤, 그녀는 혼자 일어나 창문을 열었다.
늦여름 비가 창틀을 때리고 있었다.
정현우는 침대에 조용히 누운 채 잠들어 있었다.
서연은 그의 얼굴을 오래 바라보다,
혼잣말처럼 속삭였다.
“이렇게 사랑하는데도,
왜 우리는 서로의 중심이 되지 못할까.”
그녀는 알고 있었다.
이 사랑이 끝날 수 있다는 예감을.
그리고 이제, 그 예감은 모호하지 않았다.
분명하고도 선명한 실체가 되어,
서서히 그녀의 마음을 침범하고 있었다.
[작가의 말]
정현우의 불안은, 어쩌면 사랑이 만든 그림자였을지도 모릅니다. 그림자는 빛이 있어야 생기니까요.
서연은 그 빛을 끝까지 품을 수 있을까요?
당신이라면, 이런 불안한 사랑을 계속 이어가실 수 있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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