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의 가을, 그리고 서연의 상념

낯설기만 하던 맨해튼의 거리들이 이제는 조금 익숙해졌다.
지하철 노선도는 더 이상 암호처럼 보이지 않았고,
아침마다 건너던 횡단보도와 거리마다 줄지은 카페들은
마치 오래전부터 그녀의 일상 속에 있었던 것처럼 자연스러워졌다.
연구원으로 다시 돌아온 뉴욕.
그것은 도피가 아니라, 회복을 위한 선택이었다.
정현우와의 이별-정확히는 일방적인 떠남이 라고 서연은 가끔 생각한다.
그리고 태준의 곁을 떠나면서,
서연은 더 이상 누구의 세계 안에 자신을 가두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오롯이 자신만의 삶을 살아보고 싶었다.
워싱턴 스퀘어 파크의 벤치에 앉아 책을 읽거나,
수업을 마치고 혼자 브루클린 다리를 건너며
해 질 녘의 강바람을 맞는 순간이면
서연은 이곳에서 살아가는 자신을 실감했다.
때로 허드슨강 건너에서 바라보는 뉴욕에서
서연은 뉴욕의 거대한 빌딩 숲마저 겸손하게 만드는
아름다운 경건함 빠져들곤 했다.
그러나 삶이 조금씩 안정되어 갈수록
그녀는 오히려 더 깊은 고요에 잠기곤 했다.
정현우.
그 이름은 시간이 흘러도 쉽게 침묵 속으로 사라지지 않았다.
잊은 줄 알았다. 아니, 잊기로 다짐했었다.
하지만 사람의 감정이란 것은 그렇게 단순하게 삭제되지 않았다.
서연의 일상 속에는
여전히 그의 그림자가 느껴졌다.
그림자란 원래 빛이 있어야 존재하는 것인데,
그의 부재 속에서도 서연은
그 이름을 감각으로, 온도로, 장면으로 기억했다.
한참을 가을 거리를 걷다
우연히 마주친 거리의 헌책방.
그곳에서 그녀는 바랜 고흐의 화보집 하나를 집어 들었다.
유학 시절 언젠가처럼….
낡고 빛바랜 종이 속에서
노란 해바라기와 밀밭이 번져 나왔다.
그 노란색은 단순한 색이 아니었다.
그것은 그녀의 기억 속, 정현우라는 남자의 색이었다.
“너는 나한테 고흐 같은 사람이야.”
그가 그렇게 말했었다.
고흐를 사랑했던 그 남자.
끝내 세상과 화해하지 못했던 천재의 이름을 입에 올릴 때마다
그의 눈빛은 어딘가 모르게 슬퍼 보였고,
서연은 알 수 있었다.
그는 결국 사랑 안에서도 외로움을 피하지 못할 사람이라는 걸.
그 말을 들었던 그날 밤,
서연은 그의 비극 속으로 걸어 들어가듯 그를 사랑했다.
붉은 하늘과 노란 들판 사이,
그는 자신의 고독을 그림처럼 펼쳐 보였고,
그 고독은 결국 서연에게도 옮아왔다.
그와의 사랑은 뜨거웠고 치열했다.
그러나 그 뜨거움은 결국 서로를 태워버렸고,
남은 것은 타다 남은 재와 같은 공허함이었다.
그러나,
태준과의 관계는 조용하고 따뜻했다.
그는 그녀에게 기대라는 단어 없이 다정했고,
함께 있는 시간은 잔잔한 파도처럼 서연의 삶을 감쌌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 평화로움 속에서 서연은 자주 고개를 돌렸다.
그 안에 없는 것.
그 결핍의 정체는 분명히 알 수 없었지만,
그것이 정현우와의 기억과 닿아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정현우를 사랑하지 않았다면,
나는 조금 더 쉽게 행복해질 수 있었을까?’
그 질문은 어느 날,
그녀가 고흐의 화보집을 가만히 넘기다 문득 떠올랐다.
하지만 곧바로 지워졌다.
그건 의미 없는 질문이었다.
사랑은 선택이 아니었고,
사랑이 남긴 건 상처만이 아니라
그 사랑을 견디며 서연이 된 지금의 자신이었기 때문이다.
뉴욕의 가을 하늘은 높고 푸르렀지만
그 하늘 아래에서 서연의 마음은 여전히 흐렸다.
연구실로 향하는 지하철 안에서,
그녀는 잠시 눈을 감고 정현우의 이름을 마음속에서 한 번 더 불러보았다.
아무도 모르게, 아주 조용하게.
그림자처럼 스며드는 이름.
결코 닿을 수 없는 이름.
그러나 완전히 사라질 수도 없는 이름.
그 이름과 함께, 서연은 다시 하루를 살아내고 있었다.
'감성 연애 소설 사랑의 끝을 말하다' 카테고리의 다른 글
| 23 화 그날 밤의 온도, 그리고 기억의 그림자 (2) | 2025.07.17 |
|---|---|
| 사랑의 끝을 말하다 21 화 끝에서 시작을 바라보다 (0) | 2025.07.04 |
| 사랑의 끝을 말하다 20 화 두 세계의 경계에서 그를 사랑했고, 너를 사랑한다. (3) | 2025.07.03 |
| 사랑의 끝을 말하다 19 화 태준 이라는 이름의 따뜻함 (3) | 2025.07.02 |
| 사랑의 끝을 말하다 18 화 사랑은 떠난 자리에서 자란다 (3) | 2025.07.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