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비가 내렸다.
뉴욕의 가을비는 서울보다 훨씬 조용했다.
우산을 쓰는 사람도, 바삐 뛰는 사람도 많지 않았다.
모두가 무심하고 조용히 제 할 일을 하듯,
빗방울도 담담하게 도시의 어깨를 두드렸다.
서연은 도서관에서 나오며 우산을 펴지 않았다.
젖어도 상관없었다.
어차피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도시에서,
자신 하나쯤은 젖어도, 흘러도 되는 것처럼 느껴졌다.
교정 한켠의 작은 카페에 앉아 창밖을 바라보며
그녀는 책장을 넘겼다.
하지만 활자 위로 자꾸만 정현우의 음성이 겹쳤다.
조곤조곤, 때로는 단호하고 치명적인 말투로
시 구절과 철학을 읊조리던 그의 모습이.
‘널 보면 괴로웠고, 안 보면 더 괴로웠다.’
그가 했던 말.
서연은 그 말이 얼마나 정직하고, 동시에 얼마나 무책임했는지를
이제야 비로소 깨닫는다.
그날 밤, 태준에게서 전화가 왔다.
그의 목소리는 여전히 따뜻했고,
자신을 걱정하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잘 지내? ”
“응, 과제 때문에 좀 바빴어.”
서연은 무심하게 대답했다.
태준은 알았다는 듯, 아무 말 없이 한숨을 쉬었다.
그의 한숨.
그 한숨 속엔 여러 감정이 섞여 있었다.
서운함, 이해, 그리고 어쩌면 포기.
그가 자신에게 너무 많은 것을 요구하지 않는 사람이란 걸
서연은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가 주는 평화와 안정이
자신에게는 때로 공허로 느껴질 때가 있다는 것도 부정할 수 없었다.
그날 밤, 서연은 노트를 꺼내 오래된 편지를 꺼냈다.
정현우와 나눈 마지막 메일.
잊지 말자며, 언젠가 다시 보자며 끝맺은 말.
서연은 웃었다.
기약 없는 약속.
그것은 말보다 오히려 침묵이 더 낫다는 것을,
사랑은 말로 붙잡히지 않는다는 것을
왜 그때는 몰랐을까.
잠들기 전, 고흐의 화집을 다시 펼쳐 들었다.
짙은 푸른 하늘과, 불타는 듯한 노란 밀밭.
서연은 한 장 한 장을 넘기며,
정현우를 다시, 그리고 천천히 떠올렸다.
그는 서연에게 고흐 같았다.
뜨겁고 위험했고,
영혼 깊숙한 곳까지 침범해
결국엔 그녀의 마음 어딘가를 불태우고 떠났다.
하지만 그 불씨는, 아직도 꺼지지 않은 채
서연 안에서 작게, 아주 작게,
여전히 타고 있었다.
그날 밤의 온도, 그리고 기억의 그림자
그날 밤,
태준의 손끝이 서연의 허리를 감쌌을 때
그녀는 잠시 눈을 감았다.
늦은 시간, 무심히 켜둔 창문 틈으로 가을바람이 스쳤고
침대의 시트는 체온보다 조금 차가웠다.
태준의 손길은 조심스럽고 따뜻했다.
마치 그녀의 감정을 헤아리기라도 하듯, 천천히, 물러서지 않고 다가왔다.
그 품은 다정했고, 그의 입술은 말보다 더 진심을 담고 있었지만
서연은 그 순간, 다른 그림자를 느꼈다.
정현우였다.
그의 손, 그의 시선, 그의 침묵.
그 모든 것이, 불쑥 현실의 남자 위에 겹쳤다.
서연은 태준의 눈을 피한 채 그를 안았다.
하지만 머릿속은 정현우와의 밤을 향해 열리고 있었다.
정현우의 숨소리, 정현우의 입김, 그리고 그 눈빛
사랑이라기보다, 집착에 가까웠던, 차가운 열정.
그녀는 태준의 체온을 느끼며 떨었다.
그 떨림은 설렘이 아니었다.
욕망과 죄책감 사이의 작은 진동이었다.
태준의 손이 그녀의 등선을 따라 천천히 내려왔고
서연은 눈을 질끈 감았다.
그 손길이 미끄러지듯 내려올 때마다
정현우의 손길이 그녀의 피부를 훑고 지나가는 듯한 환영이 밀려왔다.
벗겨지는 옷, 마주치는 입술, 포개지는 숨결.
그 순간 서연은 현실의 남자와
기억의 남자 사이에서 흔들리고 있었다.
태준의 몸이 그녀 위로 기울어질 때, 서연은 거부하지 않았다.
그러나 마음속 어딘가에서 또렷이 외치고 있었다.
“이건 그가 아니야.”
그녀의 손이 태준의 등을 감싸 안았을 때
입술 사이로 미세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그 소리는 분명 태준을 향한 것이었지만
동시에 정현우를 향한 이별의 몸짓 같기도 했다.
욕망과 사랑, 후회와 기억이 한순간에 뒤엉킨 밤.
그녀는 그 후로 오랫동안 태준을 볼 수 없었다.
그 따뜻하고 착한 사람에게 자신이 죄를 지은 듯한 마음.
몸은 안겼지만, 마음은 끝내 따라가지 못한 밤.
그 밤 이후, 서연은 결심했다.
‘나는 이대로는 안 되겠어.
나는 정리가 안 된 채, 아무도 사랑할 수 없어.’
그래서 그녀는 떠났다.
정현우와의 기억이 너무 깊게
그녀의 살결 깊숙이까지 새겨져 있었기 때문에.
뉴욕의 찬 바람을 맞으며
서연은 태준에게 마지막으로 메시지를 남겼다.
짧고, 조용하고, 따뜻한 이별의 문장.
그리고 한 문장만을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나는 아직, 사랑을 끝내지 못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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