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제가 뉴욕 유학 시절의 연애 경험을 바탕으로 창작한 감성 소설입니다. 현실과 허구의 경계에서 기억과 감정을 재구성해 써 내려간 이야기입니다.
"네 고마워요"
여자의 말을 듣고서야 남자의 시선은 다시
여자의 똘망하게 뜬 눈을 쳐다보며 입꼬리를 살짝 올려보이고는 제자리로 돌아간다.
여자는 자신의 입술에 고정된 남자의 시선이 신경쓰였다.
처음 본 여자에게 저렇게 미소를 흘리는 남자.....바람둥이라고 생각하면서도
그 미소가 자꾸만 여자의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여자는 엽서를 손에 쥔 채로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그저 기차 창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풍경을 멍하니 바라보며,
남자의 미소가 자신 안에 남긴 흔적을 되씹고 있었다.
주고 받은 말이 한마디 밖에...그런데
왜 이렇게 선명하게 남는 건지....
그가 다시 자리로 돌아가 앉자, 정적은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 객실을 덮었다.
하지만 여자의 마음은 이상하게 조용해지지 않았다.
오히려 더 뭉글뭉글한 것이 소리로 올라 왔다.

엽서를 뒤집어 보았다.
며칠 전, 혼자 간 전시회에서 산 구스타프 클림트의 '키스' 엽서였다.
여자는 엽서의 한쪽에 작게 적힌 메모를 보고 흠칫했다.
"무언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결국 그 앞에서 무방비해진다는 것."
그 문장을 남자가 봤을까?
뺨이 살짝 달아오르는 기분에 여자는 무심코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며 고개를 돌렸다.

당신의 품에 안기는 순간, 세상을 사라지고 관능의 심연으로 잠겨들었다. 가장 행복한 표정으로..
남자는 여전히 앞좌석 끝에 기대 앉아 책을 보고 있었다.
아니, 책을 보고 있는 척하고 있었다.
분명, 시선은 한참 전부터 책장 위에 멈춰 있었다.
여자는 단박에 그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 시선이 어딘가, 자신을 향하고 있다는 것도...
그 순간 열차가 멈췄고 문이 열리자 잠시 찬 공기가 밀려들어왔다.
남자가 천천히 일어섰다.
아무 말도 없이, 아까의 미소도 없이, 그는 여자를 스쳐 지나 자석문 앞에 섰다.
여자는 눈을 깜빡이며 그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문이 닫히고, 열차는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여자는 자신이 그에게 무언가를 말했는지도 기억나지 않았다.
다만, 엽서를 가방속에 넣으며
방금 전 그의 뒷모습이 어쩐지.... 시작 이라는 생각이 들었던것 같다.
여자는 역에서 내려 역 뒤편 주차장을 지나 신작로에 서 있었다.
여자는 어깨에 가방끈을 바짝 끌어올리며 다시 한번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8시 47분.
도저히 걸어서 강의실까지는 무리다.
좀처럼 택시가 보이지 않는다.
늦었다. 강의시간까지 10분 남짓 남아있다.
기차가 20분이나 연착되는 바람에 여자는 짜증이 났다.
오늘따라 크고 무거운 가방도, 자꾸만 올라가는 치맛자락도 신경쓰였다.
그래도 하마터면 좋아하는 클림트의 엽서를 잃어버리지 않은 것이 다행이라 여자는 생각했다.
주차장 옆 골목을 향해 조급한 발걸음을 옮기려는 그 순간
“혹시, 교수님이신가요?”
낮설지 않은 목소리가 뒤에서 들렸다.
고개를 돌린 여자는 순간 놀라 그대로 멈췄다.
기차에서 마주친, 그 남자였다.
아까보다 훨씬 부드러운 표정이었다.
하얀 셔츠 위에 얇은 트렌치코트를 걸친 채, 운전석에서 여자를 올려다 보며 말했다.
“택시 기다리시는 것 같아서요. 여긴 잘 안 잡혀요. 타세요. 학교 쪽으로 가시죠?”
사양할 말부터 떠올라야 했지만,
그보다 먼저 머릿속에 맴돈 것은 그의 눈동자였다.
기차 안에서, 머리카락 너머를 조심스레 훑던 그 눈빛.
그 시선이 다시 자신에게 닿기 전에
여자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조수석 문을 열었다.
여자는 학위를 얻고 긴 박사후 연구원 과정을 마치고 얻은 첫강의에 늦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차 안은 따뜻했다.
편안하면서도 어딘가 낯선 이 공기의 정체를 여자는 생각하고 있었다.
아... 라디오에서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5번, ‘황제’가 잔잔히 흘러나오고 있었다.
인간이 만든 가장 아름답고 완벽한 선율
그중에서도 2악장.
그 완벽함이 언젠가, 자신에게 사랑의 끝이 되어 돌아올 것이라는 예감을
누가 먼저 가르쳐 주었을까.
아니, 어쩌면 이 선율 자체가 이미 조용히 암시하고 있는 것인지도 몰랐다.
아름다움의 끝은 비애가 아닐까
그렇게 생각한 순간, 여자의 뇌리에 스친 하나의 형상.
미켈란젤로의 ‘피에타’.
숭고함이 인간적인 슬픔을 압도하는, 그 찬란한 조각상 앞에서
여자는 언젠가 다시 이 음악을 떠올릴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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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성 연애 소설 사랑의 끝을 말하다
감성 연애소설 ◁ 사랑의 끝을 말하다 ▷ 연재 중입니다.
잠시 일상을 멈추고 이별의 논리에 젖어든 한 장면 속으로 함께 걸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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